희망의 항해
11.15
그의 어깨 위로 나긋한 손길이 향했다. 살결을 타고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만 그가 야릇한 웃음을 지을 때는 초연을 깨고 과감했다. 그의 목 뒤로 따스한 입김이 스쳤다. 행복한 몸서리가 쳐진다. 그는 두 손이 저려오는 것 같았다. 하늘거리는 노란빛의 커튼을 투과한 오월의 햇살은 더욱 영롱했다. 몇 가닥 없는 그의 갈색 머리는 저 커튼보다도 윤이 났고 결이 고왔다. 가늘고 얇은 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아서 눈꺼풀 밖의 음울한 빛깔래를 살펴보았다. 그는 앞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차마 감은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여러 개의 눈꺼풀을 차곡차곡 접을 뿐이었다. 그가 눈을 뜨면 다른 이들은 그가 앞을 보는지 옆을 보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예 초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의 눈길만으로도 소외감이 들 수 있다는 것을, 남들은 그를 보고 알았다. 그의 입술에 손이 닿을 때 그는 소리없이 작은 손가락을 물었다. 손톱이 혀에 닿는 느낌은 미묘하다. 다시 손길은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을 스치기 시작했고, 곧 그는 절망의 몸을 더듬었다.
절망은 살며시 웃었다. 손가락의 촉감만으로 느낄 수 있는 절망의 아름다움이었지만 결코 절망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드라운 절망의 젖가슴을 손에 가득 넣고 한껏 움켜쥐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며 흐드러지는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의 작고 볼품없는 혀는 침도 잘 고이지 않아 수세미처럼 거칠었다. 절망의 가녀린 팔은 생기 넘치는 살색으로 풋과일처럼 싱싱했지만 절망의 몸을 만지는 그의 크고 건조한 손은 신문지처럼 희고 검기만 할 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절망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바지 지퍼를 차례로 내리려 했지만 그는 절망의 뺨을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 살짝 밀며 거부했다. 그는 의자 옆에 걸쳐 둔 지팡이를 짚고 자신의 침대에 누워 턱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점자로 된 리모컨으로 DVD플레이어를 켰다. 그가 <화양연화>를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는 셀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자신이 양조위를 닮았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예 혼자만의 믿음은 아닌 것이. 주위에서도 그가 양조위를 닮았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그는 영화 속 양조위의 목소리를 따라 읊었다. 유난히 깨끗한 배갯닢을 자근자근 씹었다.
“출근할게요. 오늘은 조금 늦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주무세요.”
절망이 화장대 앞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맨얼굴로 보일 만큼 옅은 화장이지만 눈 옆의 작은 점은 가려질 정도로, 아예 안 한 것은 아니다. 절망이 구두를 고르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 언저리에서 따각거리는 구두 소리는 다분히 요란하다. 절망이 어떤 색의 구두를 신는지 그는 알 수 없다. 이슬이 맺힌 듯한 절망의 눈도 버찌같은 입술도 모두 눈으로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절망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맞는 것이겠다. 귀머거리의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귀머거리에게 소리는 있을 수 없다. 귀머거리가 듣는, 귓가에서 맴도는 듯한 미묘한 울림 소리와 물결 소리는 결코 소리가 아닌 것이다.
“이따 저녁에 비 온댔는데, 잠깐만요, 뉴스 좀 볼게요. 괜찮으시죠?”
침묵은 곧 긍정이다. “밥솥은 고마웠습니다.”라는 대사를 마치고 기상캐스터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들이 가실 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그는 확인할 수 없었다. 절망이 우산을 챙겨간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망이 떠난 집은 썰물이 빠져나가고 난 한적한 갯벌같았다. 그는 땅밑에서 잠들어 있었던 자그마한 소라다. 머리 위로 가득히 채우고 있었던 소금물이 먼 곳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는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바닷물 밖으로 머리를 내물면 소금기에 살이 타들어간다. 하지만 갯벌 위의 따가운 햇살만큼이나 모든 것이 아렸다. 절망이 만지고 간 살갗은 기쁨이 어려 있다. 그의 살은 좋아했다. 하지만 그는 좋지 않았다. 그의 살은 그의 것이면서도, 그의 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리하고 선명한 오월의 햇살은 이렇게 눈꺼풀 한 겹을 마비시키는데 오후에는 비가 온단다. <화양연화>의 주제음, 드보르작 ‘현을 위한 세레나데’가 흐른다. 그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입술을 아주 조금만 열어 보였다.
절망은 눈이 부셔 집 앞을 계단을 걸어나오며 손차양을 한다. 검은 우산이 양산이 된다. 따사로운 햇살을 더욱 따스하게 하는 화안한 양산이다. 서늘한 구름은 바쁘게 움직인다. 빛살을 머금은 살오른 싱싱한 잎새들은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절망은 아이보리색 투피스에 진한 가죽 숄더백을 매고, 리본이 두 개 달린 세련된 구두를 신어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전철 안에서 그녀를 향하는 뭇 남자들의 시선이 거슬린다. 회사 앞, 관상용으로 만든 공원 가장자리의 작은 연못에 절망의 얼굴이 비친다. 잔잔한 물결은 거울보다 촘촘하다.
“이팀장님, 오후에 미팅 있는데 아직 안 들어가세요? 프리젠테이션 곧 시작인데...”
절망은 화들짝 놀라며 주위를 돌아본다. 묘연한 목소리다. 바로 뒤에서 들린 것 같은데 J대리는 벌써 그녀의 앞을 한참 지나쳐 간다. 미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녀가 한 일은 별로 없는데 모든 것이 그녀의 공으로 돌아간다. 결코 ‘이절망’이라는 이름처럼 그녀는 절망스럽지 않았다. 아마 이번 미팅으로 절망은 더욱 신임을 받을 것이며 월급도 더 오를 것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내내 절망은 ‘그’를 생각했다. 절망의 어머니는 절망을 낳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앓아 왔던 안암이 사망요인이었다. 예정대로라면 절망을 낳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었다. ‘그’와 살을 맞대고 같은 침대에서 자는 날이 계속될수록 어머니의 안구는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고 전염성이 있을 리도 없었지만 어머니의 눈동자엔 하루하루 희디흰 백태가 차올랐다. 그의 또렷한 얼굴을 기억에서 지워냈을 즈음 그녀는 안암 말기판정을 받았다. 아무도 그의 탓으로 돌리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에게 책임을 물었더라면 그나마 나았을 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절망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학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교내외의 경시대회에서 여러 상을 받은 것은 물론 어린 나이에 외국 TV프로에 출연한 적도 있다. 대학도 전공을 살려 금융수학을 선택했고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엘리트코스를 밟아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의 교육과 아무 도움을 싣지 못했다. 기초장애인 생계비용으로 나오는 이십 만원 남짓한 돈은 절망의 하루치 과외비에도 모자랐다. 그를 대신해서 온갖 매스컴에서 그녀에게 서포트라이트를 비추었다. 대한민국 최초 차기 필지상 후보에 오를 천재 미소녀.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절망을 더욱 신비로워 보이게 했다. 그녀의 이름이 ‘절망’인 것은 말할 나위 없었다. 지금도 십 년 전 세상의 주목을 받던, 별처럼 사라져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던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유리수 중에서 절망이 사랑하는 숫자는 2다. 소수면서도 소수가 아닌 수, 가장 매력적인 정수다. 가장 이채로운 수. 나눠지지 않는 소수로 따지면 3도 그렇지만 2처럼 깊게 와닿지는 않는다. 가능성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숫자 2처럼 절망은 아름다웠다. 절망이 열네 살 때에 발표한 논문 ‘자연수의 개념확립’은 수학계를 흔들어 놓았다. 수학은 쾌락적인 요소로 가득찬 즐거움이다. 그토록 절망은 쾌락을 사랑했다. 아직까지도 절망의 책상에는 빛바랜 공학용 계산기가 오롯이 놓여져 있다.
“쓰다듬어 주세요. 위에서 아래로 강아지처럼요. 아빠의 강아지에요. 긴 머리카락이 있는 강아지,”
절망의 그의 페니스를 입에 물고 이그러진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찬찬히 절망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강아지처럼 무릎을 꿇고 엎드린 절망의 살짝 늘어진 젖가슴을 무릎으로 건들여 보았다. 절망의 혀는 그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찾아 자극한다. 생기어린 빠알간 입술은 돛대를 감싸고 정처없이 나선의 노를 젓는다. 끝을 모르는 타원의 별의 바다를 항해한다. 허리께에 치렁거려 오는 절망의 긴 머리는 형광 물질이 발린 것처럼 희게 빛나는 뽀얀 그녀의 등에 마블링, 추상표현주의 미술처럼 넓게 퍼친다.
“내 쪽으로 누워 주겠니? 내 앞쪽으로. 나를 마주보고”
절망은 다리를 벌리고 그가 자신에게 오는 길을 열었다. 손톱자욱이 날 정도로 그의 등을 꼭 끌어안고 건조한 그의 입에 키스한다. 절망의 침으로 적셔진 그의 혀는 뼈가 있는 듯 부러질 것만 같았다. 허리를 더 많이 움직이는 쪽은 당연히 절망이었다. 그에겐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절망은 숙련되고 능란한 테크닉으로 포근하게 그를 감쌌다. 그가 지칠 즈음엔 조금 느슨하게, 여릿한 손길이 지난 후에 그가 밀물처럼 다가올 때는 한없이 촘촘하게 그를 받았다. 아주 긴 시간 끝에 사정하고, 그는 어린아이처럼 절망의 젖꼭지를 물고 빨았다. 비릿하고 달큰한 액체가 메마른 혀에 닿았다. 그는 한 손에 다른 쪽 가슴을 쥐고 절망의 젖가슴, 절망의 바다의 일부분, 빙산의 일각, 차갑고 흰 바닷물을 마셨다. 절망은 얼마 전 열공성 망막박리 2차 확정 진단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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